이창희, 법인세와 회계, 박영사(2000) 中 일부 발췌
아주 오래된 책이라 어떻게 구매하게 된 것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우연한 계기로 다시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서 기록을 위해 일부 발췌하여 옮긴다.
123-125쪽 中
연관된 손익에 대해 시차를 두어 비용은 위와 같이 바로 손금산입하고 수익은 뒤에 가서야 익금산입한다면, 사실은 세금을 걷지 않는 셈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법무법인이 올해 100원의 인건비를 들여 인적 용역을 제공하고, 그 다음 해에 보수 110원을 받는다고 하자. 이는 이 법무법인이 투자한 돈 100원의 수익률이 연 10%임을 뜻한다(110/100=110%). 현행법에 따른 세금을 고려하면 납세의무자는 올해에 인건비 100원을 손금산입하고, 보수 110원을 내년에 익금산입하게 된다. 세율이 40%라면 납세의무자는 올해에는 40원의 세금을 덜 내게 되고, 내년에는 44원의 세금을 내게 된다. 이를 고려하면 첫해 납세의무자가 투자하는 실제 금액은 100 - 40 = 60원이고, 둘째 해 납세의무자가 받는 돈은 110 - 44 = 66원이다. 결국 납세의무자는 올해 60원을 투자하여 내년에 66원을 받게 되고, 따라서 납세의무자의 투자수익률은 6/60=10%이다. 이 10%는 세금을 고려하기 전의 투자수익률 10%와 똑같다. 이는 곧 납세의무자가 아무런 세부담을 지지 않음을 뜻한다. 국가가 '세금'으로 받아 가는 돈 44원은 사실은 연 10%의 투자원리금일 뿐이다. 애초에 100원을 투자할 당시 납세의무자는 60원을 투자했을 뿐이고, 40원은 국가가 세금을 깎아 주는 형식으로 투자한 것이다. 국가는 40원에 대한 원리금 44원을 돌려받고 있을 뿐이다.
130-132쪽 中
제1차년 12월 31일 현재에 어떤 법인에게 앞으로 3년간 매년 말에 100원을 받을 수 있는 유가증권(3년이 지나면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으므로 흔히 볼 수 있는 꼴은 아니나 편의상 債券이라 부르자)이 난데없이 생겼다. 이 법인의 소득은 얼마인가? 올해에는 아직 돈 한 푼 생기지 않으므로 소득이 없고 앞으로 3년 동안 각 100원의 소득이 생겨 앞으로 네 해 동안의 소득이 (0, 100, 100, 100)원이 된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금은 소득세가 아니다! 소득이란 이 사람이 얼마나 더 부자가 되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문제의 채권과 같은 위험을 가진 다른 투자안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익률이 연 10%라면, 이 채권의 가치는 100/1.1 + 100/(1.1)^2 + 100/(1.1)^3 = 248원이 되고, 금융시장이 효율적이라면 이 사람은 이 채권을 248원에 팔 수 있다(미실현이득을 이처럼 정확히 잴 수 있는 효율적 금융시장이 실제 있는가의 문제는 여기에서는 덮어 두자. 지금 우리는 개념을 따지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납세의무자는 작년 말에는 0원의 순자산을 가지고 있다가 올해에는 248원의 순자산이 있는 것이므로 248원의 소득이 있다고 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국가가 금년에 248원을 과세하나, 앞으로 3년 동안 한 해 100원씩 과세하나 어차피 마찬가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소득과세란 당장 248원을 과세한 뒤 그 원본의 투자수익에 대해 앞으로 3년 동안 또 세금을 걷는 제도인 까닭이다. 이 납세의무자의 소득이 해마다 얼마인가, 곧 그의 부가 얼마나 느는가를 해마다 따져보자. 제1년차의 소득은 위와 같이 248원이다. 제2차년이 되면 이 납세의무자는 100원의 돈을 받는다. 한편 앞으로 2년 동안 100원씩 받을 채권의 가치는 100/1.1 + 100/(1.1)^2 = 174원이 되어 채권의 가치가 248 - 174 = 74원만큼 하락한다. 정리하면 제2차년도 동안 현금 100원이 늘고 채권의 가치가 74원 줄어 소득은 100 - 74 = 26원이 된다. 제3차년에는 채권의 값이 100/1.1 = 91원이 되어 가격의 하락액은 174 - 91 = 83원이다. 소득은 현금 100원 늘어난 데에서 채권가치하락액 83원을 뺀 17원이 된다. 제4차년에는 현금이 100원 생기고 채권값이 91원 떨어지므로 소득은 100 - 91 = 9원이 된다. 소득세란 이 납세의무자의 소득을 4년 동안 각 248원, 26원, 17원, 9원으로 보는 제도이다. (248, 26, 17, 9)원이라는 4년 동안의 소득을 단순히 합하면 300원이지만, 돈의 시간가치를 생각하면 이런 세제의 세금부담은 실현주의 세제, 곧 4년간의 소득을 (0, 100, 100, 100)원으로 보는 경우보다 무겁다.
위 문단의 분석에도 불구하고 올해에는 한 푼의 현금도 생기지 않고 앞으로 3년간 100원씩의 현금을 낳는 채권에서 (248, 26, 17, 9)원의 소득을 계산한다면, 이는 무언가 사리에 어긋난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올해를 본다면 도대체 현금이 한 푼도 생긴 바 없는데 소득이 248원이라니? 소득이라는 말이 어차피 그 속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를 우리가 정해야 하는 도구개념이라면, (0, 100, 100, 100)원이라는 내용이 담기도록 소득개념을 정하면 되는 것 아닌가? 옳은 말이다. 그러나 소득이라는 말을 그런 뜻으로 정한다면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자산의 가치가 오른 것은 소득이 아니고, 그와 같이 오른 가치가 현금화할 때 비로소 소득이 된다는 말이다. 현금이 들어와야 소득이 생긴다는 생각은 내 손에 쓸 돈이 들어와야 비로소 소득이 있다는 생각이다. 소득을 이렇게 정의하고 논리의 앞뒤를 맞춘다면, 그런 세제는 이미 소득세가 아니라 소비세로 넘어가게 된다. 결국 실현개념은 소비세의 속성이 소득세 속에 묻혀 들어와 두 세제를 어정쩡하게 타협시키고 있는 것이다. 부가 얼마나 늘었는가를 담세력의 잣대로 받아들이는 이상 실현개념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예에서 소득이 (0, 100, 100, 100)원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소득세와 소비세의 선택이 가치판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쓸 돈이 들어와야 소득이라는 생각은 소비야말로 과세물건이 되기에 적당한 잣대라는 생각이다. 어떤 사람이 소유하는 재산이 늘었다 하더라도 써 없애지 않은 이상 그 재산은 사회 전체로 본다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왜 부의 증가 그 자체가 담세력의 잣대가 되어야 하는가? 사회 전체의 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한 사람이 부의 창출에 얼마나 이바지하는가에 따라 세금을 매길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이 소비해 없애는 부가 얼마인가에 따라 세금을 매겨야 공평하지 않은가? 구태여 Thomas Hobbes의 주장*을 빌지 않더라도 소비야말로 담세력의 공평한 잣대라는 생각은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소득을 과세물건으로 삼는 현행법 속에 그와 모순되는 실현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은 것은 소득과 소비가 각각 나름대로 서로 다른 공평의 이념을 등에 업고 있는 까닭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행세제는 사실은 소득세가 아니라 소득세와 소비세를 적당히 섞은 것이다. 바로 여기에 현행세제의 기본모순이 있다.
*"what reason is there, that he which laboureth much, and sparing the fruits of his labour, consumeth little, should be more charged, than he that living idely, getteh little and spendeth all he gets."